수십 개가 넘는 묘석에 쌓인 눈을 털고 여기저기 얼어붙은 눈을 제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세이츠는 저녁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 안은 따뜻하고 밝았다. 거실에는 어느새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져 있었으며, 나무 밑에는 알록달록한 장식들이 늘어서 있었다. 마치 동화책 속 같은 풍경에 세이츠는 눈을 깜빡이던 세이츠가 갑자기 픽 웃었다. 소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구슬에 비친, 장난스러운 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세이츠는 발소리를 죽일 생각도 없이 다가가 가지를 걷었다.
"와-앙."
검은 베일을 쓰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무 뒤에서 튀어나왔다. 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굽히고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세이츠는 그를 보고 오히려 쿡쿡 웃었다.
"케이터."
"셋쨩, 전혀 안 놀랐잖아!"
놀래킨 게 한두 번이어야죠. 세이츠는 어깨를 으쓱했다. 케이터가 일어나 그녀의 코트를 벗겨주었다. 세이츠는 무거운 옷을 벗자마자 그대로 카펫 위에 주저앉았다. 케이터도 세이츠를 따라, 옆에 편하게 늘어졌다. 세이츠가 금빛 구슬을 손끝으로 톡톡 쳤다.
"저녁은 뭐 먹을래요?"
"어,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케이터가 어깨를 모아 강조한 가슴을 세이츠 앞으로 쭉 내밀었다. 부드러운 피부 대신 흰 갈비 뼈가 드러난 가슴에는, 심장 대신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아름답고, 기괴한 광경이었다. 세이츠는 그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장미에 여상한 눈길을 던졌다.
"크리스마스 저녁이니까…칠면조랑 민스 파이 어때요? 케이크도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상관없어. 근데 셋쨩, 그거 다 먹을 거야?"
"혼자 먹기는 좀 많을지도 몰라요."
"그렇지?"
"그럼 칠면조 속은 가볍게 채울까요."
"결국 다 먹겠다는 얘기네…"
케이터는 난감한 웃음으로 대화를 마쳤다. 그럼 조금 있다 식사 준비를 하자고 할까. 가만히 앉아 재료를 떠올리던 세이츠의 눈에 작은 램프 모양 장식품이 들어왔다. 램프 안에 든 전구가 빛을 받아 불꽃처럼 빛났다. 세이츠와 같이 따뜻한 주황색 빛을 바라보던 케이터가 불쑥 말했다.
"옛날 생각나네. 둘이 처음 만난 날."
"거의 두 달 되었죠? 처음 만난 게 할로윈 밤이니. 무덤에서 해골이 튀어나오다니. 신기한 일도 다 있다 싶었어요."
"셋쨩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런 얼굴이었어. 전혀 무서워하질 않으니, 오히려 이쪽이 놀랐다니까."
보름달이 뜬 할로윈 밤. 묘지기는 램프를 들고 묘지를 순찰하고 있었다.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온다는 할로윈 밤에 스산한 묘지를 둘러보는 게 두려울 만도 하건만, 그는 겁먹기는커녕 가볍게 졸고 있었다. 통행로도 묘지도 전부 살펴봤으니 이제 슬슬 들어갈까. 늘어지게 하품이 나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도중, 묘지기는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저만치 앞 언덕에서 달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내려와 묘석 하나를 비추고 있었다. 길도 없는 곳에 저런 묘석이 있었던가? 그는 램프를 치켜들고 언덕을 올랐다. 언덕 꼭대기에는 파헤쳐진 무덤이 있었다. 구덩이 안에 검은 관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도굴꾼이라도 온 게 아닌가 걱정하며 샅샅이 무덤을 살폈지만,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묘지기는 구덩이 안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구덩이 가장자리로 고개를 내민 순간, 관이 덜컹하고 흔들렸다. 관은 연이어 덜컹덜컹 들썩대더니 이내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관 속에는 새까만 어둠만이 차 있었다.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여러모로 수상한 무덤이었다. 묘지기는 구덩이 안으로 뛰어내렸다. 랜턴을 조금 더 높이 치켜들고 관 안을 비추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스윽 손이 뻗어 나와 어깨를 붙잡았다. 어둠은 몸을 일으켜 인간의 형상이 되었다, 모자 아래에서 녹색 눈이 번뜩였다. 온통 검은 몸과 달리, 머리칼만큼은 노을을 닮았다. 그 망자는 고개를 왼쪽으로 휙 돌려 베일을 걷어내고는
유쾌하게 외쳤다.
"Trick or treat!"
약 15분 뒤, 묘지기와 망자는 나란히 무덤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묘지기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망자가 베일 끝을 만지작거렸다.
"어… 이거 되게 어색하다."
그가 힐끗힐끗 묘지기를 훔쳐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이 관자놀이를 찌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묘지기는 눈빛을 받아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깜짝 놀라 랜턴을 휘두를 때는 언제고, 그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진정했다. 어쩔 줄 모르고 손끝을 따각따각 묘석에 부딪히던 망자가 곧 좋은 구실을 찾은 듯 조금 밝은 목소리로 묘지기에게 말을 걸었다.
"너, 나를 소환한 인간이잖아. 원하는 게 뭐야? 어떤 소원을 들어줄까?"
"필요 없는데요."
조금 녹으려던 공기가 다시 쩡 하고 얼어붙었다. 단순한 대답에 망자는 다시 풀이 죽어 묘석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예 관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은 듯한 태도였다. 그가 작게 투덜거렸다.
"아무 것도 안 할 거면 왜 묘지를 일곱 번씩이나 도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의식을 치른 거야."
"의식?"
묘지기가 드디어 망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색한 분위기를 깰 수 있어 신이 난 듯, 줄줄이 설명을 시작했다.
"할로윈 밤에 망자가 살아난다는 소문은 알지? 그건 그냥 뜬소문이 아니야. 랜턴을 들고 묘지에서 일곱 바퀴 돌면 관을 열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거야. 중요한 건 자정에 맞춰 일곱 바퀴를 전부 돌아야 한다는 거!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원래 자리로 돌아오면 의식은 성공이야."
아뿔싸. 할로윈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잔뜩 기분이 들떠 집으로 돌아간다. 그중에는 집에 돌아가기 전에 묘지에서 담력 테스트를 하는 얼간이나, 겁도 없이 무덤 근처 수풀에서 밀회를 나누는 커플도 있었다. 묘지기는 그런 바보들을 잡아내기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이 묘지를 돌았다. 세지도 않고 있었는데 그게 딱 일곱 번이었다니.
"귀찮은 일이… 다시 돌아갈 방법은 없나요?"
묘지기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망자가 미안한 듯 웃었다. 그러나 뒤에 따라오는 대답은 한없이 가벼웠다.
"글쎄, 나도 자주 소환당해 본 게 아니어서. 저번에 현세에 나왔을 때는 시간이 지나니 저절로 돌아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날 부른 사람에게 찔렸었거든.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기억을 되살리는 그를 보며 묘지기는 겉옷을 입었다. 바닥에서 주워든 등불에 희미하게 비친 얼굴은 여전히 피곤해 보였다. 그가 당연하다는 듯, 망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충 알겠어요. 여기서 계속 앉아 있을 수도 없으니 일단 집으로 가죠.“
그렇게 케이터는 세이츠의 집에 얹혀살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활기차고 애교 있게 말을 걸고, 집안일도 싹싹하게 잘 도왔다. 그러나 세이츠가 명계로 돌아갈 방법만 물으면 갑자기 한량이 되었다. 이렇게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걸, 하고 딴청을 피우는 케이터의 태도에 더는 화가 나지 않게 되자 벌써 크리스마스 언저리가 되어 있었다.
둘은 크리스마스 식사를 차렸다. 붉은 테이블보가 깔린 식탁 위에 차례차례 음식이 올랐다. 민스 파이와 가벼운 핑거 푸드. 가운데에는 갈색으로 잘 익은 칠면조가 올랐다. 세이츠는 둘 앞에 뱅쇼를 한 잔씩 따라 놓은 후, 양손에 포크와 칼을 들고 본격적으로 칠면조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칠면조 다리를 하나 자른 후 접시에 담에 케이터 앞에 먼저 내려놓았다. 어차피 나는 못 먹는다니까. 케이터는 속으로 피식 웃었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얌전히 세이츠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세이츠는 케이터의 몫을 챙긴 뒤 자신의 접시 위에도 음식을 한가득 담았다. 눈을 반짝이며 식사를 시작한 세이츠를 케이터는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어떻게 돌아가느냐는 말 안 하네."
"그러네요."
"이대로 못 돌아가면, 내년 크리스마스에도 같이 식사하겠네?"
"그렇네요.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뭐 먹고 싶어요? 민스 파이 말고 다른 요리도 해 보고 싶은데."
세이츠가 포크로 파이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케이터는 대답이 없었다. 세이츠가 곤란한 질문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셀 수도 없는 세월 동안 고요했던 가슴 속에서, 무언가 움칫 뛰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케이터는 앞에 놓인 접시를 바라보았다. 식탁에 차린 요리들이 빠짐없이, 정갈하게 전부 놓여 있었다. 세이츠는 내년 크리스마스에도 케이터가 먹지도 않을 음식을 접시에 가득 담아주기 위해 요리를 할 것이다. 따스한 안도감이 몸속에 기분 좋게 풀어졌다. 나, 여기 있어도 괜찮구나. 안도감 후 뱃속에 기쁨이 차올랐다. 온몸이 기분 좋게 근질거렸다. 이대로 앉아 있다가는 바보처럼 헤실거리게 될 것 같아, 케이터는 자리에서 냉큼 일어났다.
"셋쨩, 또 나한테 물어본다."
죽은 사람은 먹을 수 없대도. 케이터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대신 전축 앞으로 다가가 레코드판을 끼웠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레코드판 위에 바늘을 올렸다. 곧 방 안에 캐롤이 울려 퍼졌다.
"케-쨩은, 고추가 잔뜩 들어간 감바스가 좋아."
둘은 식사를 하고, 서로 선물을 건네고, 상대가 준 우스운 선물을 보고 서로 배가 찢어질 것처럼 웃었다. 선물 포장지가 늘어선 트리 밑에 배를 깔고 카드 게임을 했다. 조커를 놓고 서로 투닥투닥 말다툼하고, 이내 지쳐 카드를 꽃잎처럼 공중에 날렸다. 케이터는 100년 전의 크리스마스에 대해, 세이츠는 100년 후의 크리스마스에 대해 의견과 장난스러운 거짓말과 상상을 늘어놓다, 키득거리며 고개를 맞댔다. 벽난로 앞에 담요를 두르고 서로 앉아 꾸벅꾸벅 졸다, 잠든 상대방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장난을 쳤다. 모두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 세이츠는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지난밤 크리스마스는 아주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은 꿈의 끝 같았다. 꿈이 의식을 놓아주지 않아, 세이츠는 멍한 머리를 붙잡고 잠자리에서 한참을 뒤척여야 했다. 케이터는 이미 옆에 없었다. 세이츠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쳐 입고 비척비척 거실로 나왔다. 공기는 이상하게 차갑고, 조용했다. 세이츠는 무거운 정적을 깨기 위해, 일부러 큰 소리로 케이터를 불렀다.
"케이터?"
대답 대신 싸늘한 침묵만이 되돌아왔다. 세이츠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케이터! 역시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세이츠는 금세 깨달았다. 돌아갔구나. 죽은 자의 세계로. 이미 각오는 하고 있던 일이었다. 세이츠는 어젯밤 케이터가 앉아 있던 소파를 손으로 쓸었다. 차가웠다. 처음부터 누가 앉아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매끄럽고 깨끗했다. 세이츠는 잠시 시트를 쓰다듬다, 이내 몸을 돌려 청소를 시작했다. 바닥에 널린 선물 포장지를 모아 쓰레기통에 넣고, 굴러다니는 트럼프 카드를 모아 케이스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 트리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세이츠는 크리스마스 트리 위에 빨간 봉투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금빛 테두리가 둘린 봉투는 포인세티아 모양의 장식물로 봉해져 있었다. 세이츠가 봉투를 집어올리자 무언가 툭 떨어졌다. 새의 머리뼈를 닮은 장식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케이터가 베일을 고정할 때, 잘 쓰곤 했던 물건을 작게 줄여놓은 듯했다. 세이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장식을 주워들었다. 손안에서 장식을 만지작거리며 읽는 편지 안에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작별의 말이 쓰여 있었다.
셋쨩에게
안녕 셋쨩. 아무래도 길게는 못 쓸 것 같네. 갑자기 돌아가게 됐어. 동이 트는가 싶더니, 갑자기 명계로 불려 갔지
뭐야. 제대로 된 인사도 못 해서 미안. 잘 있어. 건강해야 해, 셋쨩.
추신: 내년 크리스마스에 다시 보자. 셋쨩이 먼저 초대한 거니까 무르기 없기!
메리 크리스마스 & 해피 할로윈. 케 군이.
사라지기 전에 매우 급하게 갈겨 썼는지, 글씨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눈물이 나오기도 전에, 비식비식 웃음이 삐져나왔다. 이 사람은 사라지기 직전에도 뻔뻔하다니까. 그는 내년 크리스마스에, 오래 만나지 못한 친구를 보러 오는 이처럼 태연하게 문을 두드리겠지. 세이츠는 편지봉투에 가만히 입술을 대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해피 할로윈.
'DREAM > TWST'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썰백업 (22.04.03~22.06.29) (0) | 2022.09.07 |
|---|---|
| Prologue (0) | 2022.08.13 |
| [세이케이] 몽치 님(@mongchi_tarot) 타로 커미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0) | 2022.07.13 |
| onabare....................... (0) | 2022.04.13 |
| 몽치 님(@mongchi_tarot) 타로 커미션: **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에 갇혀버렸다 (0) | 2022.04.0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