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개가 넘는 묘석에 쌓인 눈을 털고 여기저기 얼어붙은 눈을 제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세이츠는 저녁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 안은 따뜻하고 밝았다. 거실에는 어느새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져 있었으며, 나무 밑에는 알록달록한 장식들이 늘어서 있었다. 마치 동화책 속 같은 풍경에 세이츠는 눈을 깜빡이던 세이츠가 갑자기 픽 웃었다. 소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구슬에 비친, 장난스러운 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세이츠는 발소리를 죽일 생각도 없이 다가가 가지를 걷었다.

"와-앙."

검은 베일을 쓰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무 뒤에서 튀어나왔다. 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굽히고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세이츠는 그를 보고 오히려 쿡쿡 웃었다.

"케이터."
"셋쨩, 전혀 안 놀랐잖아!"

놀래킨 게 한두 번이어야죠. 세이츠는 어깨를 으쓱했다. 케이터가 일어나 그녀의 코트를 벗겨주었다. 세이츠는 무거운 옷을 벗자마자 그대로 카펫 위에 주저앉았다. 케이터도 세이츠를 따라, 옆에 편하게 늘어졌다. 세이츠가 금빛 구슬을 손끝으로 톡톡 쳤다.

"저녁은 뭐 먹을래요?"
"어,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케이터가 어깨를 모아 강조한 가슴을 세이츠 앞으로 쭉 내밀었다. 부드러운 피부 대신 흰 갈비 뼈가 드러난 가슴에는, 심장 대신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아름답고, 기괴한 광경이었다. 세이츠는 그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장미에 여상한 눈길을 던졌다.

"크리스마스 저녁이니까…칠면조랑 민스 파이 어때요? 케이크도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상관없어. 근데 셋쨩, 그거 다 먹을 거야?"
"혼자 먹기는 좀 많을지도 몰라요."
"그렇지?"
"그럼 칠면조 속은 가볍게 채울까요."
"결국 다 먹겠다는 얘기네…" 

케이터는 난감한 웃음으로 대화를 마쳤다. 그럼 조금 있다 식사 준비를 하자고 할까. 가만히 앉아 재료를 떠올리던 세이츠의 눈에 작은 램프 모양 장식품이 들어왔다. 램프 안에 든 전구가 빛을 받아 불꽃처럼 빛났다. 세이츠와 같이 따뜻한 주황색 빛을 바라보던 케이터가 불쑥 말했다. 

"옛날 생각나네. 둘이 처음 만난 날."
"거의 두 달 되었죠? 처음 만난 게 할로윈 밤이니. 무덤에서 해골이 튀어나오다니. 신기한 일도 다 있다 싶었어요."
"셋쨩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런 얼굴이었어. 전혀 무서워하질 않으니, 오히려 이쪽이 놀랐다니까."

 


 


보름달이 뜬 할로윈 밤. 묘지기는 램프를 들고 묘지를 순찰하고 있었다.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온다는 할로윈 밤에 스산한 묘지를 둘러보는 게 두려울 만도 하건만, 그는 겁먹기는커녕 가볍게 졸고 있었다. 통행로도 묘지도 전부 살펴봤으니 이제 슬슬 들어갈까. 늘어지게 하품이 나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도중, 묘지기는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저만치 앞 언덕에서 달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내려와 묘석 하나를 비추고 있었다. 길도 없는 곳에 저런 묘석이 있었던가? 그는 램프를 치켜들고 언덕을 올랐다. 언덕 꼭대기에는 파헤쳐진 무덤이 있었다. 구덩이 안에 검은 관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도굴꾼이라도 온 게 아닌가 걱정하며 샅샅이 무덤을 살폈지만,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묘지기는 구덩이 안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구덩이 가장자리로 고개를 내민 순간, 관이 덜컹하고 흔들렸다. 관은 연이어 덜컹덜컹 들썩대더니 이내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관 속에는 새까만 어둠만이 차 있었다.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여러모로 수상한 무덤이었다. 묘지기는 구덩이 안으로 뛰어내렸다. 랜턴을 조금 더 높이 치켜들고 관 안을 비추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스윽 손이 뻗어 나와 어깨를 붙잡았다. 어둠은 몸을 일으켜 인간의 형상이 되었다, 모자 아래에서 녹색 눈이 번뜩였다. 온통 검은 몸과 달리, 머리칼만큼은 노을을 닮았다. 그 망자는 고개를 왼쪽으로 휙 돌려 베일을 걷어내고는 
유쾌하게 외쳤다.

"Trick or treat!"

약 15분 뒤, 묘지기와 망자는 나란히 무덤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묘지기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망자가 베일 끝을 만지작거렸다. 

"어… 이거 되게 어색하다."

그가 힐끗힐끗 묘지기를 훔쳐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이 관자놀이를 찌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묘지기는 눈빛을 받아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깜짝 놀라 랜턴을 휘두를 때는 언제고, 그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진정했다. 어쩔 줄 모르고 손끝을 따각따각 묘석에 부딪히던 망자가 곧 좋은 구실을 찾은 듯 조금 밝은 목소리로 묘지기에게 말을 걸었다.

"너, 나를 소환한 인간이잖아. 원하는 게 뭐야? 어떤 소원을 들어줄까?"
"필요 없는데요."

조금 녹으려던 공기가 다시 쩡 하고 얼어붙었다. 단순한 대답에 망자는 다시 풀이 죽어 묘석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예 관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은 듯한 태도였다. 그가 작게 투덜거렸다.

"아무 것도 안 할 거면 왜 묘지를 일곱 번씩이나 도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의식을 치른 거야."
"의식?"

묘지기가 드디어 망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색한 분위기를 깰 수 있어 신이 난 듯, 줄줄이 설명을 시작했다.

"할로윈 밤에 망자가 살아난다는 소문은 알지? 그건 그냥 뜬소문이 아니야. 랜턴을 들고 묘지에서 일곱 바퀴 돌면 관을 열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거야. 중요한 건 자정에 맞춰 일곱 바퀴를 전부 돌아야 한다는 거!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원래 자리로 돌아오면 의식은 성공이야."

아뿔싸. 할로윈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잔뜩 기분이 들떠 집으로 돌아간다. 그중에는 집에 돌아가기 전에 묘지에서 담력 테스트를 하는 얼간이나, 겁도 없이 무덤 근처 수풀에서 밀회를 나누는 커플도 있었다. 묘지기는 그런 바보들을 잡아내기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이 묘지를 돌았다. 세지도 않고 있었는데 그게 딱 일곱 번이었다니.  

"귀찮은 일이… 다시 돌아갈 방법은 없나요?"

묘지기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망자가 미안한 듯 웃었다. 그러나 뒤에 따라오는 대답은 한없이 가벼웠다. 

"글쎄, 나도 자주 소환당해 본 게 아니어서. 저번에 현세에 나왔을 때는 시간이 지나니 저절로 돌아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날 부른 사람에게 찔렸었거든.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기억을 되살리는 그를 보며 묘지기는 겉옷을 입었다. 바닥에서 주워든 등불에 희미하게 비친 얼굴은 여전히 피곤해 보였다. 그가 당연하다는 듯, 망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충 알겠어요. 여기서 계속 앉아 있을 수도 없으니 일단 집으로 가죠.“

 

 




그렇게 케이터는 세이츠의 집에 얹혀살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활기차고 애교 있게 말을 걸고, 집안일도 싹싹하게 잘 도왔다. 그러나 세이츠가 명계로 돌아갈 방법만 물으면 갑자기 한량이 되었다. 이렇게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걸, 하고 딴청을 피우는 케이터의 태도에 더는 화가 나지 않게 되자 벌써 크리스마스 언저리가 되어 있었다.  

둘은 크리스마스 식사를 차렸다. 붉은 테이블보가 깔린 식탁 위에 차례차례 음식이 올랐다. 민스 파이와 가벼운 핑거 푸드. 가운데에는 갈색으로 잘 익은 칠면조가 올랐다. 세이츠는 둘 앞에 뱅쇼를 한 잔씩 따라 놓은 후, 양손에 포크와 칼을 들고 본격적으로 칠면조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칠면조 다리를 하나 자른 후 접시에 담에 케이터 앞에 먼저 내려놓았다. 어차피 나는 못 먹는다니까. 케이터는 속으로 피식 웃었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얌전히 세이츠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세이츠는 케이터의 몫을 챙긴 뒤 자신의 접시 위에도 음식을 한가득 담았다. 눈을 반짝이며 식사를 시작한 세이츠를 케이터는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어떻게 돌아가느냐는 말 안 하네."
"그러네요."
"이대로 못 돌아가면, 내년 크리스마스에도 같이 식사하겠네?"
"그렇네요.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뭐 먹고 싶어요? 민스 파이 말고 다른 요리도 해 보고 싶은데."

세이츠가 포크로 파이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케이터는 대답이 없었다. 세이츠가 곤란한 질문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셀 수도 없는 세월 동안 고요했던 가슴 속에서, 무언가 움칫 뛰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케이터는 앞에 놓인 접시를 바라보았다. 식탁에 차린 요리들이 빠짐없이, 정갈하게 전부 놓여 있었다. 세이츠는 내년 크리스마스에도 케이터가 먹지도 않을 음식을 접시에 가득 담아주기 위해 요리를 할 것이다. 따스한 안도감이 몸속에 기분 좋게 풀어졌다. 나, 여기 있어도 괜찮구나. 안도감 후 뱃속에 기쁨이 차올랐다. 온몸이 기분 좋게 근질거렸다. 이대로 앉아 있다가는 바보처럼 헤실거리게 될 것 같아, 케이터는 자리에서 냉큼 일어났다. 

"셋쨩, 또 나한테 물어본다."

죽은 사람은 먹을 수 없대도. 케이터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대신 전축 앞으로 다가가 레코드판을 끼웠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레코드판 위에 바늘을 올렸다. 곧 방 안에 캐롤이 울려 퍼졌다. 

"케-쨩은, 고추가 잔뜩 들어간 감바스가 좋아."

 


둘은 식사를 하고, 서로 선물을 건네고, 상대가 준 우스운 선물을 보고 서로 배가 찢어질 것처럼 웃었다. 선물 포장지가 늘어선 트리 밑에 배를 깔고 카드 게임을 했다. 조커를 놓고 서로 투닥투닥 말다툼하고, 이내 지쳐 카드를 꽃잎처럼 공중에 날렸다. 케이터는 100년 전의 크리스마스에 대해, 세이츠는 100년 후의 크리스마스에 대해 의견과 장난스러운 거짓말과 상상을 늘어놓다, 키득거리며 고개를 맞댔다. 벽난로 앞에 담요를 두르고 서로 앉아 꾸벅꾸벅 졸다, 잠든 상대방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장난을 쳤다. 모두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 세이츠는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지난밤 크리스마스는 아주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은 꿈의 끝 같았다. 꿈이 의식을 놓아주지 않아, 세이츠는 멍한 머리를 붙잡고 잠자리에서 한참을 뒤척여야 했다. 케이터는 이미 옆에 없었다. 세이츠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쳐 입고 비척비척 거실로 나왔다. 공기는 이상하게 차갑고, 조용했다. 세이츠는 무거운 정적을 깨기 위해, 일부러 큰 소리로 케이터를 불렀다.

"케이터?"

대답 대신 싸늘한 침묵만이 되돌아왔다. 세이츠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케이터! 역시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세이츠는 금세 깨달았다. 돌아갔구나. 죽은 자의 세계로. 이미 각오는 하고 있던 일이었다. 세이츠는 어젯밤 케이터가 앉아 있던 소파를 손으로 쓸었다. 차가웠다. 처음부터 누가 앉아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매끄럽고 깨끗했다. 세이츠는 잠시 시트를 쓰다듬다, 이내 몸을 돌려 청소를 시작했다. 바닥에 널린 선물 포장지를 모아 쓰레기통에 넣고, 굴러다니는 트럼프 카드를 모아 케이스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 트리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세이츠는 크리스마스 트리 위에 빨간 봉투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금빛 테두리가 둘린 봉투는 포인세티아 모양의 장식물로 봉해져 있었다. 세이츠가 봉투를 집어올리자 무언가 툭 떨어졌다. 새의 머리뼈를 닮은 장식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케이터가 베일을 고정할 때, 잘 쓰곤 했던 물건을 작게 줄여놓은 듯했다. 세이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장식을 주워들었다. 손안에서 장식을 만지작거리며 읽는 편지 안에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작별의 말이 쓰여 있었다.

 

 


셋쨩에게

안녕 셋쨩. 아무래도 길게는 못 쓸 것 같네. 갑자기 돌아가게 됐어. 동이 트는가 싶더니, 갑자기 명계로 불려 갔지 
뭐야. 제대로 된 인사도 못 해서 미안. 잘 있어. 건강해야 해, 셋쨩.

추신: 내년 크리스마스에 다시 보자. 셋쨩이 먼저 초대한 거니까 무르기 없기!

메리 크리스마스 & 해피 할로윈. 케 군이.

 



사라지기 전에 매우 급하게 갈겨 썼는지, 글씨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눈물이 나오기도 전에, 비식비식 웃음이 삐져나왔다. 이 사람은 사라지기 직전에도 뻔뻔하다니까. 그는 내년 크리스마스에, 오래 만나지 못한 친구를 보러 오는 이처럼 태연하게 문을 두드리겠지. 세이츠는 편지봉투에 가만히 입술을 대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해피 할로윈.

 
ⓒ 뉘서 님


  살짝 부담될 정도로 눈부신 조명
. 귀가 먹먹한 함성. 소란을 뚫고 선명히 들려오는 바닥과 농구화가 마찰해 만드는 날카로운 소리. 케이터는 턱을 괴고 저 아래 있는 코트에 시선을 던졌다. 마치 점처럼 보이는 선수들 사이에서 꽃잎처럼 날아다니는 분홍빛이 있었다. 세이츠가 시원하게 경기장을 가로질렀다. 푸른 눈이 매섭게 골을 노리고 있었다. 흰 농구화가 바닥을 박찼다. 앞을 가로막은 선수들을 제치고, 마른 몸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텅 하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울려온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어서 팔을 쳐들고 환호했다. 수많은 손바닥과 환호의 장막 너머에서, 케이터는 세이츠가 제 쪽으로 슬쩍 키스를 날리는 것을 보았다. 코트에서 관중석까지 늘어선 수많은 장애물을 피해 둘은 잽싸게 눈빛을 교환했다. 기쁨과 충족감에 반드르르 빛나는 보석 같은 눈동자가 케이터에게 옛일을 떠올리게 했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딱 맞는 각도를 잡으려 있는 대로 팔을 뻗고 있던 케이터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나 조금 꼴사나운 자세였을 텐데. 괜히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케이터를 부른 주인공은 분홍빛 머리를 한 소녀였다. 헐렁하게 자켓을 풀어헤치고,, 움직이기 편해 보이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두 손에는 제법 렌즈가 커다란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위로 시원하게 치켜 올라간 눈이 케이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케이터는 자신이 아직 우스운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은근슬쩍 팔을 거두었다.

 

  “그럼 부탁해 볼까-. 근데 누구? 기숙사에서 본 것 같긴 한데.”

  “세이츠. 하츠라뷸 2학년이에요.”

 

  소녀는 짧게 대답하고 어서 포즈를 취해보라는 듯 사진기를 들어 올렸다. 케이터는 순간 그녀의 동작에 압도당했다. 카메라를 알맞게 들고, 렌즈를 조절하고, 주의 깊게 파인더를 들여다보는 움직임이 마치 잘 숙련된 검사가 매끄럽게 시연하는 검법과 닮아 보였다. 단순히 사진을 찍는 동작이 이렇게나 아름답고 절도 있게 느껴지는 까닭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안광이 흘긋 엿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멍하니 눈길을 빼앗긴 케이터에게 무뚝뚝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뒤로.”

  “?”

  “뒤로 두 걸음.”

 

  케이터는 그녀가 손짓하는 대로 홀린 듯 움직였다. 이쯤이면 돼? 세이츠는 말없이 버튼을 몇 번 조작하더니 다시 케이터에게 명령했다. 옆으로. 케이터는 다시 옆으로 이동했다. 가많이 카메라를 만지던 그녀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 케이터는 순간 움찔했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기백에 눌리는 느낌이었다.

 

  “좀 더 왼쪽으로 옮길까나-.”

  “자리를 옮기죠.”

 

  세이츠는 케이터를 쳐다보지 않은 채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눈은 여전히 파인더에 고정되어 있었다. 케이터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슬금슬금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세이츠를 따라 도착한 곳은 하츠라뷸 정원 한구석이었다. 꽤 구석진 곳이었지만, 정원 곳곳에 물을 주는 게 일이었던 케이터에게는 익숙한 장소였다. 숨겨둔 비장의 장소라도 있을 줄 알았떠니. 케이터가 속으로 살짝 실망하건 말건 세이츠는 다시 진지하게 카메라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왼쪽으로 반걸음만. 몸을 조금 틀어 보세요. 고개는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폭풍처럼 쏟아지는 요구에 따라 한참을 어딘가 잘못된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자니 셔터 소리와 함께 구원 같은 말을 들렸다.

 

  “이제 됐어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케이터는 희미하게 미소를 띤 그녀와 마주쳤다. 만면에 충족감이 가득했다. 아직 사진기에 박혀 있는 푸른 눈은 아까보다 더, 케이터가 여지껏 본 모든 것보다 더 생기 가득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태도에서는 마치 먹이를 포식한 고양이와 같은 포만감마저 엿보였다. 세이츠는 신중하게 사진을 비교하더니 한 장을 골라 케이터에게 보여주었다.

 

  “이거에요.”

 

  다른 사진은 보여주지조차 않았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이 사진이 부정할 수 없는 마스터피스라는 듯 내놓았다. 물론 받아든 사진은 인생샷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대단한데! 전문 포토그래퍼가 찍은 사진 같아.”

  “고마워요.”

 

  칭찬하자 세이츠는 조금 으쓱해졌다. 케이터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하게 드러나 우쭐함이 살짝 귀엽다고 생각했다.

 

  “여기, 메일 주소 줄 테니까 사진 보내줘~.”

 

  케이터는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세이츠는 능숙한 솜씨로 메일 주소를 입력해 주었다.

 

  “땡큐-. 기왕이면 마지카메 아이디로 알려 줄래? 사진 진짜 마음에 들어서 말이지. 좀 더 보고 싶어.”

 

  그녀는 기꺼이 마지카메 아이디도 알려 주었다. 둘은 서로 마지카메를 맞팔하고, 메일 주소도 교환했다. 케이터는 매일 밤 세이츠의 마지카메를 체크했다. 그녀의 계정에는 늘 하나씩 사진이 올라왔다. 햇살이 잘 드는 학원 구석 풍경, 마치 만찬처럼 보이는 평범한 구내식당 음식 사진. 새삼스레 예쁘게 보이는 하츠라뷸 정원의 장미. 가끔은 환하게 웃고 있는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고, 남몰래 인상을 찌푸릴 때도 있었다. 비몽사몽한 아침에, 수업 시간 중 책상 밑에서, 샤워하고 젖은 머리로 침대에 엎드려서 수많은 메시지가 오갔다.

 

  그 중 어느 순간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걸까. 어쩌다 세이츠를 마주치면 가슴이 들뜨는 때가 있었다. 골치 아픈 일도 전부 잊어버리고 가볍게 세이츠 곁으로 달려가던 순간들. 귀찮다는 듯이 몸을 빼는 그녀에게 일부러 더 달라붙어서, 셋쨩의 사진이 좋은걸. 하고 핑계 아닌 핑계를 대던 순간들이 느긋하게 생각 저변으로 흘러내려갔다.. 케이터는 추억의 물살에 손을 담근 채, 찬찬히 사랑했던 세이츠를 골라냈다.

 

 

 


 

 

 

  “셋쨩, 경기 수고했어! 오늘 경기도 멋진걸.”

 

  케이터는 자판기에서 뽑아온 이온 음료를 세이츠에게 내밀었다. 세이츠는 흰 수건으로 가볍게 얼굴과 머리에 맺힌 땀을 털었다. 세이츠가 양손으로 수건을 모아 뺨에 댄 채 케이터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셋쨩? 귀엽게. 너스레를 떨자 그녀가 푸스스 웃었다.

 

  “아뇨. 선배 경음부 공연도 기대하고 있다고요. 선배도 무대 위에서 나만큼이나 멋지니까요.”

 

  케이터는 그 순간 자신이 처음 좋아했던 세이츠를 잡아냈다. 무엇이든 너답게 해낸 뒤, 이럴 줄 알았다며 웃는 네가 좋아. 그리고 이렇게, 솔직하게 사람을 뒤흔드는 면도 좋을까나?

 
 

 

몽치 님께 받은 로판AU 타입 메일링 타로 커미션입니다.

↓↓↓몽치 님 콜리 주소↓↓↓

https://ccoli.co/@mongchi_cmcm/4987

이번에도... 세케가 세케함 (관계성 그대로 보인다는 뜻,)

사실 이거 혼자 하도 읽어서 살짝 너덜너덜해짐

제일 좋아하는 꽁치김치찌개 공개


 

케이터는 상인 집안의 아들입니다. 상인이라고 해도 거대한 귀족가의 상단처럼 부유하진 않아서, 끊임없이 대륙 여기저기를 어릴 적부터 돌아다녀야 했어요. 납품 처였던 귀족가나 소국의 왕가가 멸망하면 또다시 새 납품 처를 찾아 떠나기 일쑤입니다. 그러다 보니 잦은 이사로 점점 친구들도 멀어지게 되었어요. 정들 만하면 떠나고, 그리고 또 새로운 동네 친구들을 사 귀고, 시간이 지나면 짐을 꾸려 떠나는 삶. 케이터는 이 모든 행위에 질려가던 참이었습니다. 어차피 헤어질 친구라면 얕게 사귀는 것이 나아. 케이터는 점점 자라며 친구 관계를 ‘적당히’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사를 갈 때는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다며 엉엉 울곤 했었는데 말이에요. 이러는 편이 케이터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고 편리하다고 생각해가던 참이에요.

 

그러던 중, 세이츠네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어요. 세이츠네 마을은 작은 강을 끼고 작게 발달한 마을입니다. 하지만 마을 전체가 공방에 가까운지라, 이곳에서 나는 질 좋은 수제 공예품들이 왕가며 귀족가로 직접 납품되고 있어요. 케이터네는 운송 수단을 도맡아 관리하며 납품 단계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케이터의 아버지는 케이터에게, 더 이상 이사 가지 않아도 될 정도라며 내심 케이터에게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습니다. 그간 잦은 이사로 케이 터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는지, 가족으로써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케이터는 더 이상 그 말을 믿지 않아요. 그저 웃으며 ‘새 친구들’을 사귀러 나가는, 늘 하던 일과의 반복. 이번에는 몇 달이나 머물까. 케이터는 벌써 이 마을을 떠날 생각부터 하고 있습니다. 친구를 처음 만나기도 전에 이별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간 케이터가 경험을 바탕으로 쌓아온 일종의 자기 방어예요.

 

세이츠는 마을의 골목대장입니다. 단순히 조용한 세이츠를 얕보고 덤벼오는 아이들을 몇 번 쓰러뜨려 주었더니 어느새 골목대장이 되어 있었을 뿐이지만요. 마을 아이들 중에서 달리기도 가장 빠르고, 승부욕이 강해 어떤 게임을 해도 곧잘 이기곤 합니다. 무엇보다 풍경화를 잘 그려서 벌써부터 자작가나 남작가에 납품할 정도예요. 마치 그 공간을 똑 떼어 캔버스에 옮겨 둔 것 같다며,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칭찬이 벌써부터 마을에 자자합니다. 마을에 막 온 케이터도 그 소문을 접했을 정도로요.

 

둘은 적당히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합니다. 케이터는 그저,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만 친구를 사귀어 왔어요. 잦은 이사로 한때 친구를 잘 사귀지 못했더니, 부모님이 울며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누나들은 케이터더러 너무 신경 쓰지 말라 했지만, 커가며 집안 사정을 이해하게 된 케이터는 ‘부모님이 안심할 정도로만’ 친구를 사귀는데 도가 트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번 마을에서 케이터의 레이더망에 잡힌 사람은 바로 세이츠입니다.

 

햇살은 따뜻하고, 강물은 조용히 흘러가고, 이따금씩 새소리가 들려오는 어느 한가로운 봄날, 세이츠는 그날도 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비싸다는 푸른 물감도 제법 떠 두곤 여유롭게 붓을 놀리고 있어요. 케이터가 그런 세이츠에게 다가가 말을 걸려고 하지만, 마을 아이들이 말립니다. 세이츠가 ‘일’을 할 때에는 말을 걸면 큰일 난다면서요. 어디의 귀족 나으리가 의뢰했다나, 어쨌다나요. 때문에 케이터는 세이츠가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케이터에게 있어서 조금 생소한 일이에요. 빠르고 얕게 친구를 사귀는데만 몰두한 나머지, ‘단지 친구가 되기 위해’ 타인을 기다리는 건 제법 오랜만이거든요. 늘 먼저 급하게 말을 걸고, 사교적인 말투로 살갑게 다가가고, 함께 수다를 떨고, 그러다가 또 헤어지고, 그런 반복적인 루틴에 처음으로 금이 가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얌전히 풀밭에 앉아, 뒤에서 아이들이 공놀이하는 소음을 들으며, 캔버스를 채워나가는 세이츠를 구경하는 것은 제법 재미있었다고 해요. 선선한 바람이 그 광경을 한껏 더해 줍니다. 만약 케이터가 그때 그림을 그릴 줄 알았었다면, 그 세이츠의 뒷모습을 그대로 캔버스에 담고 싶었다고 훗날 회고합니다.

 

케이터는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기다려서야 겨우 세이츠에게 첫인사를 건넬 수 있었어요. 하지만 세이츠의 반응은 건조합니다. 그래? 반가워. 정도가 끝이네요. 너희 집은 무슨 일을 하느냐고, 어디에서 왔느냐고 따발총처럼 물어오던 다른 아이들과는 다릅니다. 아이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서일까요. 아니면 특유의 건조하면서도 다정한 분위기 탓일까요. 혹여나 이런저런 질문을 해 온다면 ‘사교적으로’ 보이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답변들이 모두 물에 풀어지듯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케이터는 조금 얼빠진 표정으로 뺨을 긁적여요. 생각보다 공략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런 케이터의 분위기를 딱하게 여겼는지, 아니면 말이 통하는 또래가 케이터밖에 없어서였는지는 몰라도, 세이츠는 케이터에게 ‘할 일이 없다면 자신의 작업을 도와달라’고 말해요. 케이터는 흔쾌히 수락합니다. 꼬꼬마들의 기분을 맞춰주는 것도 피곤하고, 케이터 자신도 말이 손쉽게 통하는 또래가 편하니까요.

 

그다음 날부터, 케이터는 세이츠의 조수로 일하게 됩니다. 어느 날은 강가로, 어느 날은 산 위로, 캔버스며 이젤, 물감 통을 들고 낑낑대며 세이츠의 뒤를 따르게 되어요. 이렇게 힘들다는 말은 없었잖아-! 라며 불평해 보아도, 친구가 없어 멀뚱하니 서 있는 것보다야 낫지 않느냐고 반박해오는 세이츠입니다. 이어 내가 왜 친구가 없냐는 케이터의 불평 섞인 말을 뚝 잘 라요. 친구 없잖아. 한 마디로 말입니다. 케이터는 세이츠가 말하는 ‘친구’의 의미를 너무나도 뼈저리게 깨달아 버려서,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세이츠의 뒤를 따라요. 어쩐지 재수 없으면서도, 건조하지만 다정하게 케이터를 챙겨주는 그 일련의 행동들이 제법 마음에 들어서……. 하루하루 세이츠의 뒤를 따르는 것이 재미있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세이츠의 뒤에서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세이츠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세이츠의 옆에서 집중하는 세이츠의 눈동자를 관람하곤 해요. 수다스러운 케이터가 유일하게 조용해지는 순간,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나 바람소리를 귀에 담을 수 있는 그 시간들이 소중해져서……. 케이터는 이 마을이, 세이츠가 마음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따라다닌 지 한 달 즈음되었을까요. 케이터와 세이츠는 제법 친해졌어요. 연령대가 비슷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함께 하루도 빠짐없이 붙어 다닌 지 한 달 정도 되었다면 누구든 간에 친해지는 법입니다. 몇몇 짓궂은 어린아이들은 케이터와 세이츠가 사귄다며 놀리기 일쑤예요. 세이츠의 꿀밤을 맞고 이내 조용해졌지만요.

 

그 무렵부터 케이터는 세이츠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간단한 붓질부터, 이내 남은 물감 덩어리를 물에 조금 풀어 자투리 천 위에 제법 그럴듯한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옆에서 봐주기도 해요. 세이츠의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아무 말 않고 기다리는 케이터가 심심해 보였다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 외에도, 케이터가 앞으로 또 이사를 가게 된다면 이 마 을만은 잊지 말아 달라는 세이츠의 당부 때문입니다. 세이츠는 이 마을을 사랑해요.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이 나라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을도, 마을에 속한 세이츠 자신에게도 큰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 비록 잠깐 머물다 가게 될지언정, 케이터도 이 마을의 풍경을 오래오래 기억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세이츠는 케이터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게 되었어요. 케이터는 세이츠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붓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심 그림을 배우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을 딱 들킨 것 같아 귀가 빨개진 것도 모른 채로.

 

물감이 부족하면 근처의 꽃잎을 따 짓이겨 붓에 묻히기도 하고, 오래된 붓으로 선을 긋다 그만 망가뜨리기도 하며 케이터는 천천히 그림을 배워나갑니다. 그런 진중한 작업은 자신과 맞지 않다며 냅다 뒤로 벌렁 누워버린 날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세이츠는 시크하게 마음대로 하라는 말뿐, 조금만 더 해보라며 매달려오는 법이 없습니다. 세이츠로써는 정말 케이터가 무리할까 봐 적당히 해도 좋다는 의미로 건넨 말이지만, 케이터는 괜히 세이츠의 기백에 눌려 투덜대면서도 붓을 잡곤 했습니다. 아무리 그림을 그려나가는 과정이 귀찮을지언정, 케이터가 그림을 완성하면 세이츠가 싱긋 웃어주기 때문이에요.

 

케이터는 그렇게 세이츠와 친한 친구가 되어요. 세이츠는 케이터가 진솔하게 풍경을 그려내는 모습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입니다. 또한 마을 안에서만 살았던 세이츠와 다르게 케이터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으니까요. 케이터가 기억을 더듬어 그려낸 풍경을 보고, 그 광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마을 바깥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케이터와 세이츠는 약속을 해요. 이담에 케이터가 커서 작은 상단을 차리게 되면, 세이츠와 함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자고요. 여러 풍경을 보고, 그리고, 마음뿐만 아니라 눈으로도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세이츠의 이름을 새긴 화집을 내서, 돈을 벌고, 그리고 그 돈으로 더 좋은 붓과 물감을 사고……. 그렇게 이야기는 점점 먼 미래를 향해 흘러갑니다. 누군가의 만남 이후에는 이별만 있다고 생각했던 케이터에게는 상당히 신기한 일이에요. 당장 내일 이사를 갈지도 모르는데, 성인이 된 후의 일을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다니요. 그리고 그 상상 속 에는 세이츠가 늘 함께합니다. 어쩐지 조금 쑥스러우면서도, 세이츠가 있다면 정말로 실현될 것 같은 꿈들입니다. 

 

그렇게 우정을 이어나가던 중, 늘 그랬듯 케이터는 또다시 이사를 가게 됩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제법 오래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짐을 싸던 도중, 세이츠가 케이터를 찾아와요. 잘 가라느니, 그동안 즐거웠다느니 하는 뻔한 인사 대신 세이츠는 단 한 가지를 묻습니다. ‘언 제 다시 와?’ 그 말에 놀라 눈을 끔뻑대는 케이터에게 부연 설명을 시작해요. 나를 데리러 간 다고 했잖아. 여러 나라를 함께 가 준다고 했으니까……. 케이터는 침묵합니다. 차마 치기 어린 충동이었다고 말할 수 없어요. 세이츠의 저 강물을 닮아 푸른 눈이 올곧게 자신을 바라봐오면, 그 수다스러운 입도 꾹 다물어지고 마니까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언젠가는 이 마을에 돌아와 함께 세상을 구경하러 가자고, 세이츠와 케이터는 결코 스쳐 지나가는 한 때의 인연이 아니라고 단언해요. 그렇게 케이터는 새로운 마을을 향해 떠나게 되었습니다. 세이츠가 선물해 준, 케이터를 그린 그림을 품에 꼭 안고서요.

 

이후 케이터는 여전히 가족을 따라 이사하게 됩니다. 그 간격이 몇 년 단위로 길어졌다고 한들, 상단의 일원인 이상 거처를 옮겨 다닐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케이터는 더 이상 이전처럼 이사 다니는 일을 지겹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그곳의 풍 경을 그려 소중히 보관해두는 습관이 생겼어요. 케이터에게는 돌아갈 곳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든 간에, 케이터는 세이츠에게로 돌아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는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C. 토끼 님

 

+ Recent posts